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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무죄 무전유죄 영화 홀리데이,한의철 안광술 지강헌 인질극 사건
2020년 6월 14일에 방송된 SBS 스페셜에서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1부'가 공개됐답니다. 이날 방송에서는 방송인 장성규, 개그우먼 장도연, 영화감독 장항준이 이야기꾼으로 등장해 각각 김지혁 아나운서, 개그맨 김여운, 개그우먼 송은이에게 그날의 이야기에 대해 들려주었답니다.
지난 1988년 10월 16일, 88년 서울 올림픽의 흥분이 채가시지 않은 그때 TV를 통해 생중계된 한 사건이 있었답니다. 평화로운 일요일 아침에 일어난 북가좌동의 인질극 바로 '지강헌 사건'이랍니다. 당시 권*을 든 지강헌은 겁에 질린 여성을 인질로 붙잡고 경찰을 향해 요구사항을 이야기했답니다. 그의 요구사항은 비지스의 '홀리데이'를 들려달라는 것입니다.
지강헌은 인광술, 한의철, 강 OO씨와 함께 인질극을 벌였고 당시 지강헌의 나이는 35세, 나머지는 모두 20대 초반의 남성들이었답니다. 인질극이 펼쳐지던 현장 주변에는 경찰들과 취재진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답니다. 그때 지강헌은 "나는 시인. 나는 미래를 보고 과거에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이다"라고 스스로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흔히들 알고 있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을 남겼던 것이 바로 지강헌이랍니다.
당시에 10월 8일 토요일 중부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던 죄수 호송 버스가 있었답니다. 그 버스에는 미결수 25명이 타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안성 부근을 지날 때 재소자 한 명이 교도관에게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말했답니다. 그리고 교도관이 죄수에게 소변통을 건네는 순간 재소자들이 일제히 일어나 난투극을 벌였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죄수들에게 점령당한 호송 차량입니다. 이때 죄수들은 교도관들과 옷을 바꿔 입었고 이들 중 13명은 안전한 감금을 선택했고 12명은 재소자 카드를 다 찢어버리고 권총과 실탄을 챙겨 탈출했답니다.
이에 전국은 초 비상 상태였답니다. 이 중 2명은 당일 검거, 3명은 룸살롱에서 호스티스까지 불러 놀다 주인의 신고로 경찰에 붙잡혔답니다. 그리고 당시 룸살롱 주인은 600만 원의 현상금까지 받았답니다. 아직 남은 7명의 죄수, 그들이 선택한 것은 인질 숙박입니다. 그들은 서울시 곳곳의 가정집에 들어가 머무르기를 반복했답니다. 그리고 이들이 가정집을 선택한 것은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함이었답니다.
2번의 인질 숙박 이후 이들의 행동은 과감해졌답니다. 이들은 백주대낮에 대학병원의 주차장에 침입해 제약회사 영업사원을 인질로 삼아 그의 집으로 향했답니다. 그리고 제작진은 32년 만에 실제 인질들에게 그날의 일에 대해 직접 들었답니다. 당시 35세였던 인질은 그날의 일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답니다.
그는 "그들이 내게 다가와서 칼을 겨누는 순간 느껴지는 거지. 이 친구들이구나"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가족들의 안위를 생각하며 탈주범들과 2박 3일 동안의 계약 동거를 택했답니다. 제약회사 직원이었던 인질은 수면제를 떠올리고 인질범들에게 먹일 생각도 했답니다. 하지만 현실은 드라마나 영화와 달랐고 인질은 곧 다른 방법을 생각했답니다.
하지만 아들을 인질로 삼은 지강헌 때문에 다른 행동도 할 수 없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답니다. 그리고 인질은 탈주범들과 함께 당일 저녁 함께 술도 마셨다고 말했다. 최초의 국산 럼주 캡틴 큐를 함께 마신 이들이랍니다. 그리고 이때 탈주범들은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답니다. 어려서부터 없이 힘들게 살았으며 이 곳 저곳에서 이어진 홀대와 냉대로 힘들었던 날들을 고백했답니다.
지강헌을 인질극을 벌이던 당시 "내가 살아오면서 죄를 많이 지었지만 나에게도 예쁜 모습도 있었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답니다. 실제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만 졸업한 지강헌, 그는 도둑질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반복된 냉대와 차별로 상처도 많이 받았던 것으로 밝혀졌답니다. 시인이 꿈이었던 지강헌은 스스로에 대해 "난 대한민국 최후의 시인이다. 행복한 거지가 되고 싶었던 낭만적인 염세주의자다"라고 말하기도 했답니다. 그리고 그는 탈주를 한 이유에 대해 "대한민국의 비리를 모두 파헤치고 죽겠다"라며 "연희궁으로 가려다 경비가 심해서 그만뒀다"라고 말했답니다.
지강헌의 죄목은 7차례 걸쳐서 현금, 승용차 등 약 556만 원을 절도한 것입니다 이에 그가 받은 형량은 징역 7년에 보호감호 10년입니다. 보호감호란 재범의 가능성이 있는 이들을 징역 후 감호소에서 머물게 하는 것으로 실제로는 징역과 다를 것 없는 것이었답니다. 지강헌의 경우 17년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보호감호 제도를 만든 것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던 전두환이랍니다.
그는 80년 국가보위위원회를 신설하고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를 단행했답니다. 이에 영장도 없이 6만 명을 검거, 그중 4만여 명을 삼청교육대로 보내고 이 중 수많은 이들이 훈련 도중 사망했답니다. 그리고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오지 청송에 청송 보호감호소를 건립해 상습 범죄자들을 장기 구금할 수 있는 '사회보호법'을 제정했답니다. 이에 자전거 한 대를 훔쳐도 징역 3년에 보호감호 10년, 고총 9천 원어치 절도로 징역 1년 6개월에 보호감호 7년을 선고받기도 했답니다. 그리고 이는 이중처벌, 과잉처벌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2005년에 폐지되었답니다.
하지만 이러한 법에 자유로운 이가 있었답니다. 당시 리틀 전두환도 불렸던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랍니다. 그는 막강한 권력으로 횡령 등의 범죄를 저질렀답니다. 그리고 몇백억 원을 횡령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재판부에서 인정한 횡력액만 76억 원입니다. 이로 전경환이 받은 형량은 고작 7년형. 그리고 그는 3년 정도 살다가 석방이 되었답니다. 형평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당시 상황이랍니다. 이에 이런 말이 탄생했던 것입니다. 계엄 상황을 방불케 하는 현장에서 지강헌과 3명은 도주했던 4번째 인질 숙박을 이어갔답니다.
당시 TV에서 탈주범들의 뉴스를 보고 있던 22세의 여대생은 이미 방 안에 들어와 있는 탈주범들을 목격하고 충격을 감추지 못했답니다. 노부모와 함께 살고 있던 4번째 집의 인질입니다. 그는 "70이 넘은 아버지가 밥은 먹었냐. 밥부터 차려라 라고 하셨다. 그래서 어머니가 고추장찌개와 이것저것을 준비했고 정말 맛있게 식사를 하더라"라고 말했답니다. 식사 후 마음이 누그러진 탈주범들은 집주인이 신발을 벗으라는 말에 순순히 신발도 벗고 바닥을 닦으라고 걸레까지 건넸답니다.
안정을 찾은 탈주범들은 여대생에게 질문 하나를 던졌답니다. 그들은 "어떻게 죽는 게 제일 멋있어 보이냐. 옥상에서 떨어지는 게 멋있냐. 총에 맞아 죽는 게 멋있냐"라고 물었던 것. 이들은 이미 죽음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을 터입니다. 그리고 여대생이었던 인질은 탈주범들을 순순히 나가게 할 방법을 생각하다가 성경을 읽어줄 것을 결정했답니다. 이에 지강헌은 어느 순간 여대생에게 말을 걸어왔답니다.
그는 여대생에게 "나를 위해 기도를 해줄 수 있겠냐"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이에 당시 여대생이었던 인질은 "그래서 뭐라고 기도를 해드릴까요 했더니, 내가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 마음이 되게 해달라고 하더라. 그래서 하겠다고 하면서 둘이 같이 앉아서 기도를 했다. 기도를 하니까 엄청나게 울더라. 저도 울고 그분도 울고 같이 울었다"라고 말해 눈길을 끌었답니다. 어디에서도 밝혀진 적 없는 지강헌과 인질의 이야기에 이 사실을 전해 들은 모든 이들이 숙연해졌답니다.